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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쿠르스크로 간 북한군

지난 8월엔 우크라이나의 역습에 점령당한 러시아 영토로, 요즘엔 북한군의 파병지로 관심의 대상이 된 쿠르스크는 ‘세알못(세계사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인 기자에겐 지명조차 가물가물했던 지역이다. 역사책을 펼쳐보니 러시아는 물론 세계사에 상당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80여년 전 나치 독일과 소련이 총력전을 펼친 격전지로,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결정하는 전쟁터였기 때문이다.   1943년 7월 쿠르스크 일대에 히틀러의 독일군 80만 명, 스탈린의 붉은 군대 190만 명이 집결했다. 양측이 동원한 전차가 8000여 대, 항공기가 5000여 대에 이르러 단일 전투로는 사상 최대 규모라고 전사(戰史)엔 기록됐다. 스탈린그라드의 참패 이후 전황을 뒤집을 ‘한방’이 절실했던 히틀러는 전선 돌출부인 이곳에 대공세를 계획했다. 공격을 예상한 스탈린은 민간인 30만 명을 동원해 미리 구축한 총 3000마일의 참호, 40만개의 지뢰에 의지해 방어전을 폈다. 독일군은 결국 방어선을 뚫지 못했고, 전투 이후 소련의 맹렬한 반격에 쩔쩔매며 후퇴를 거듭했다. 나치 패망을 예고하는 변곡점이었던 셈이다.   소련의 후계자 러시아는 매년 프로호로프카에서 기념식을 연다. 1943년 7월 12일 나치 친위대 기갑부대 전차 294대와 소련군 탱크 793대가 맞붙었던 곳이다. 약 3㎢에 불과한 공간에서 ‘전차의 백병전’이 벌어졌고, 8시간 만에 700여 대가 파괴됐다. 당대 최강 전차 ‘티거’를 보유한 독일군이 소련 전차부대를 거의 궤멸시켰지만, 소련의 물량 공세에 입은 피해도 커 더는 진격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프로호로프카는 러시아에겐 국난 극복, 애국심의 상징이 됐다. 지난해 무장 반란을 일으켰던 프리고진이 의문의 추락사를 당하던 날, 푸틴 대통령은 프로호로프카에서 기념식을 주재하며 ‘조국에 대한 헌신’을 강조했다.   80여 년이 흐른 지금 전쟁도, 국제관계도 변했다. 전차·항공기 대신 무인기(드론)이 전장의 주역이 됐다. 나치 독일이란 공동의 적에 맞서 소련에 무기와 전비, 정보를 제공했던 미국·영국은 러시아에 대항하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한다. 전쟁이 숱한 인명을 앗아간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고기 분쇄기’로 불리는 러시아식 인해전술은 적군과 자국군 모두에 공포의 대상이다.   지난 4일 미국은 쿠르스크에 배치된 북한군이 1만 명으로 늘어났다고 확인했다. 북한군이 이미 전투에 투입됐고, 교전 중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은 유럽뿐 아니라 한반도에도 심각한 안보 위협이다. 북한의 참전, 한국의 대응에 후대 역사가들은 어떤 평가를 내릴까. 천인성 / 한국 중앙일보 국제부장노트북을 열며 북한 쿠르스크 쿠르스크 일대 소련 전차부대 러시아식 인해전술

2024-11-06

[노트북을 열며] “해리스야, 트럼프야?”

“해리스야, 트럼프야?” 고교 동창 모임에서 친구들이 물었다. 종종 받는 질문이나 마음이 불편하다. 찍어도 정답률 50%인, 사실상 OX 문제인데도, 딱 부러지게 답을 못하니 국제부 기자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물론 확신에 차 답할 때도 있긴 했다. 대선 토론에서 바이든이 ‘폭망’하고, 트럼프가 총격을 받고도 무사했던 때 말이다. 하지만 바이든과 바통 터치한 해리스가 순조롭게 민주당 전당대회를 치른 뒤부터 “아직 모른다. 끝까지 봐야겠다”고만 답하고 있다. 야속한 벗들은 더는 설명을 들으려 하지 않았지만, 이곳에라도 기자가 답을 못하는 이유를 남기려 한다.   선거 판세 예측의 가장 중요한 도구는 여론 조사다. 요즘 미 대선 여론조사 결과가 하루에도 1~2건씩 나오고 있긴 하다. 하지만 얼마나 두 후보가 얼마나 팽팽한 대결을 벌이고 있는지 재차 확인될 뿐, 30여 일 뒤 최종 승자를 예상하는 데엔 도움되지 않고 있다. 미국 특유의 주별 선거인단 제도 탓에 어차피 전국 차원 조사는 이런 초박빙 대결에선 의미가 없다. 그래서 격전지로 꼽히는 6개 경합주에 대한 여론 조사 결과를 챙겨보는데, 해리스 등판 이후 대다수 조사 결과가 두 후보의 지지율 차이가 오차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걸로 나온다. 알다시피 ‘오차 범위 내 우세’는 아무리 우겨도 ‘우세’가 될 수 없다. 최근 최대 격전지 펜실베이니아에서 해리스가 오차범위 밖으로 앞섰다는 조사가 두 건 정도 나오긴 했는데, 차이 나는 조사 결과도 있어 더 지켜봐야 한다.   ‘샤이 트럼프(shy Trump)’란 변수도 고려해야 한다. 2016년 힐러리 클린턴과의 대결에선 여론 조사상 트럼프가 밀리는 거로 나왔지만, 개표 결과는 정반대였다. 8년 전과 달리 인공지능(AI) 활용 등으로 여론조사 정확도가 높아졌다는 주장, 선거가 ‘백인 남성 대 유색인종 여성’ 구도가 되면서 속내를 감추는 유권자가 늘었다는 추정 모두 나온다. 기자는 트럼프의 숨은 표가 실제 몇%나 될지는 투표함을 다 열기 전엔 알 수 없다고 본다.   다른 변수도 있다. 워낙 초박빙이라 최종 승자가 법원 판결로 가려질 가능성도 있다. 이미 공화당은 경합주 등을 상대로 선거 규칙, 투표자격 등을 문제 삼는 소송을 90건 이상 제기했다. 대부분 선거 캠페인 차원의 일환으로 보이나 후보 간 표 차이가 미세한 주에선 이런 소송의 승패가 선거인단 확보를 좌우할 수도 있다.   게다가 투표일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여, 결코 짧지 않다. 지지율의 반전을 가져올 사건·사고가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다. 천인성 / 한국 중앙일보 국제부장노트북을 열며 해리스 트럼프 여론 조사상 대선 여론조사 여론조사 정확도

2024-10-02

[노트북을 열며] 오물 풍선, 오물 발상

지난달 28일 미국 대통령 선거 TV토론은 평양에서도 유심히 봤을 터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미약한 성량과 불안한 눈빛을 보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후보가 백악관에 재입성하면 진행할 3차 정상회담 장소를 구상했을까. 약 열흘 전 평양 순안공항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새벽 2시 45분까지 기다리며 속 끓이던 때를 상기하며, 그래도 트럼프 같은 구관이 명관이라고 생각했을까.   한편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오물 풍선으로 바빴다. 북한은 5월 28일부터 이달 2일까지 6차례 오물 풍선을 38선 이남으로 날려 보냈다. 김 부부장은 첫 살포 다음날 조선중앙통신에 본인 명의 성명을 냈다. “‘표현의 자유 보장’을 부르짖는 자유민주주의 귀신들에게 보내는 진정어린 성의의 선물.” 기생충 인분과 쓰레기로 북한 주민의 고된 일상이 주목받자 이젠 애꿎은 종잇조각을 주로 보내며 표현의 자유를 논하다니, 왠지 딱한 마음마저 든다. 기자뿐만 아니다. 지난주 주한 외국인 커뮤니티에서 만난 유럽인 기자는 “그런 도발을 해야 하는 북한 처지가 딱해 보인다”고 했고, 동남아인 교수는 “수준이 낮아도 너무 낮다”고 혀를 찼다.   딱한 건 오물 담은 풍선을 날려 보내자는 발상 자체가 오물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북한 지도부다. 핵심 인물인 김여정 부부장이 직접 나서 궤변을 늘어놓는 것도 애처롭다. 오물 풍선을 보내겠다는 의기양양한 발상과 행동이 결국 한반도의 갑갑한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생각에 마음은 더 답답해진다. 그렇다고 약 2678만원(서울시와 경기도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이라는 재산 피해가 묵과될 순 없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마주친 김여정 부부장을 기억한다. 특급 호텔 마리나샌즈베이에서 걸어나오던 그는 흰색 실크 블라우스 차림에 한껏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런 그가 6년 후 구상한 논리가 고작 ‘오물 풍선을 보내는 것도 표현의 자유’라니, 실망스럽다.   바이든 대통령의 TV토론 직후 그의 측근부터 뉴욕타임스(NYT) 논설실까지 아름다운 퇴장을 권하는 것을 보며 김 위원장과 김 부부장 남매는 역시 민주주의는 불편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실 그 반대다. 최고 권력자에게 용퇴를 권할 수 있는 자유, 그런 표현의 자유야말로 민주주의가 빛나는 이유다. 오물풍선으로 북한이 더럽히는 건 스스로의 얼굴임을 김 위원장과 김 부부장은 깨달아야 한다. 오물 풍선은 발상 자체가 오물이다. 전수진 / 한국 투데이·피플팀장노트북을 열며 오물 풍선 오물 풍선 6차례 오물 자유민주주의 귀신들

2024-07-03

[노트북을 열며] 우리의 국익, 네이버의 이익

축구도, 야구도 ‘한일전’이면 일단 흥행한다.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역사는 ‘일본에 더이상은 뺏기면 안된다’라는 공감대의 뿌리가 됐다.   이 국민감정이 최근 ‘라인야후 사태’로 옮겨붙었다. 네이버 클라우드의 보안 사고를 이유로, 일본 정부가 ‘네이버와 라인야후 간 자본적·기술적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초법적이고 반자본주의적 관치(官治)다. 우리끼리는 ‘검색시장 독점 기업’이라고 때릴지언정, 그 네이버가 일본에서 얻어맞는 모양새에 여론이 들끓었다. 야당 대표의 “이토 히로부미 손자의 사이버영토 침탈”이라는 추임새까지 더해지면서 사태는 산으로 가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선 네이버가 라인야후 주식을 1주라도 일본 소프트뱅크에 넘기면 ‘국익’이 훼손되는 것이요, 지분 매각을 정부가 막지 못하면 이 정부는 ‘매국’이 될 참이다. 네이버의 계산과는 상관없이 여론의 잣대가, 정치의 계산속이 그렇다. ‘이번에 쉽게 내주면 일본 정부가 또 그럴지 모른다’는 국민들의 위기감을 ‘여의도’는 재빠르게 알아채는 데, 이 정부만 눈치가 없다.   하지만 이 사태의 마무리는 여론이 정한 국익이 아니라, 네이버가 판단한 실익에 따라 정리돼야 한다. 내셔널리즘이 득세하는 요즘엔 국가의 이익과 기업의 이익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럴 때 정부나 여론은 경쟁국에 큰소리를 치더라도, 기업은 실익을 따져 조용히 국경을 오가며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성장한다.   미국이 그걸 잘한다. 미국의 국익은 중국에 첨단기술 공급을 차단하는 것이지만, 미국 기업들의 이익은 세계 최대의 시장을 낀 중국과 잘 거래하는 것이다. 얼마 전 미국 상무부는 중국과 관련 있는 커넥티드 차량 기술도 미국 판매를 금지하겠다는 엄포를 놓으며 한국 자동차 업계를 잔뜩 긴장시키고 있는데, 정작 미국 기업 테슬라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중국 정부로부터 완전자율주행(FSD) 데이터 사용 허가를 따내며 미래를 대비하고 있다. 미국의 계산된 ‘성동격서’에 한국 기업들만 마음 졸이는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   우리도 좀더 차분하게 계산해야 한다. 라인의 성공 이후 네이버는 일본을 넘어 동남아·중동·북미로 나가 웹툰·클라우드 같은 새로운 서비스와 기술을 키우고 있다. 라인야후 지분은 네이버의 현재 전략에 따라 기업·주주의 이익을 고려해 결정할 일이다. 그 지분을 쥐고 있는 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지금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기업의 가치는 끊임없이 변한다. 그러니 판단도, 책임도 기업에 맡겨야 한다. 국익에 기업을 너무 가두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게 국익을 가장 길게 지키는 길일 수 있다. 박수련 / 한국 산업부장노트북을 열며 네이버 국익 국익 네이버 네이버 클라우드 라인야후 지분

2024-05-15

[노트북을 열며] 죽은 나발니가 산 푸틴을 잡는 법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가장 위협적인 정적이자 반체제 운동가인 알렉세이 나발니가 지난 16일(현지시간) 결국 숨졌다. 충격적이지만,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다. 어쩌면 독살 시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뒤 제3국으로의 망명을 택하지 않고 러시아에 돌아간 순간부터 그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왜 귀국했을까.   “하도 물어봐서 짜증났던 질문이다. 교도관들마저 녹음기를 끈 채로, 투옥이 확실하고 죽을 수도 있는데 왜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나의 조국도, 신념도 포기할 수 없었다. 가치 있는 신념을 갖고 있다면, 희생을 하더라도 기꺼이 지켜내야 한다.”   생전 나발니를 여러 차례 취재했다는 전 뉴욕타임스(NYT) 모스크바지국장 닐 맥파쿼가 전한 나발니의 답이다. 그는 나발니의 귀국을 그리스 고전에도 비유했다. “영웅은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간다. 돌아가지 않는다면 영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맥파쿼는 나발니가 ‘푸틴 정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신조를 갖고 있었고, 오히려 망명으로 잊히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분석도 전했다. 그에게 정치란 곧 행동에 옮기는 것이었기에, 귀국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나발니는 정말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수감 중 화상으로 법정에 출석할 때마다, 또 SNS를 통해 푸틴에 대한 날 선 비판을 쏟아냈다. 사망 전날만 해도 판사를 향해 “당신 연봉으로 내 (영치금) 계좌를 보충해 달라”는 냉소적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푸틴이 나발니의 사망에 관여한 게 맞다면, 이런 나발니의 의연한 태도가 푸틴의 무언가를 자극한 게 틀림없다. 수십 년간 투옥으로 영웅이 된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사례를 푸틴이 걱정했다는 맥파쿼의 언급처럼 말이다. 공포를 지배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폭군이 아무리 억압해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 상대를 만난다면,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는 쪽은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다.   반대의 싹을 완전히 잘라내는 게 푸틴의 의도였다면, 빗나갔다. 사망했기에 나발니는 만델라, 마틴 루서 킹의 반열에 올랐다. 벌써 ‘포스트 나발니’로 여러 인물이 거론된다.   나발니는 용기의 상징으로 남았고, 푸틴의 두려움은 세상에 드러났다. 그가 생전 보여준 용기와 당당함으로 추측하건대 ‘죽어서도 살아 있는 푸틴을 잡을 수 있다’고, 눈감는 순간에도 나발니는 생각했으리라. 유지혜 / 한국 외교안보부장노트북을 열며 푸틴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블라디미르 러시아 넬슨 만델라

2024-02-21

[노트북을 열며] 상실의 시대를 건너는 법

잃음과 잊음의 무의미한 반복. 삶은 결국 그것뿐일까.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무언가를 계속 잃어가는 것이라고 ‘죽음학(thanatology)’ 전문가인 임병식 한신대 교수는 말했다. 잃는다는 건 고통을 수반한다. 지난해 세밑, 세상을 잃겠다는 선택을 한 고(故) 이선균씨 소식은 고통스러웠다. 마녀사냥으로 얼룩졌던 댓글 창이 경찰과 언론에 대한 비난으로 표변하는 걸 목도하는 과정은 씁쓸했다.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유서를 남긴 그의 죽음이 불온한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는 건 아닌지. 온당한 애도가 아닌, 산 자들의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 감정표출과 ‘정의의 사도’를 표방하는 새된 목소리들이 넘친다. 임 교수는 지난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타자의 죽음을 쉽게 정죄하면서 오인한다. 남을 나라는 자기중심적 사고로 판단한다.”   남겨진 그의 가족들은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아버지의 극단적 선택을 겪었던 .나는 자살생존자입니다.(문학동네)의 황웃는돌 작가의 말을 감히 위로와 함께 전한다. “삶은 결국 강물이다, 흘러야 하고, 흘러간다.” 슬픔은 분노와 망각이 아닌 슬픔과 애도로 맞아야 한다. 눈물이 날 땐 눈물을 참는 게 아니라 더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우는 게 맞다고 황 작가는 전한다. “울고 싶은만큼 울어도 돼”라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을 독자들이 여럿일 것 같다.   죽음부터 일방적 이별까지, 여러 얼굴을 한 상실은 삶의 일부다. 갓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괜찮은 슬픔(Good Grief)’엔 “슬픔을 회피하는 건 곧 사랑을 회피하는 것”이란 말이 나온다. 상실로 인한 슬픔을 잊으려 발버둥 치는 건 곧 삶에 대한 사랑에 눈을 감는 것이 된다는 의미 아닐까. 상실과 슬픔을 온전히 느낀 뒤 삶의 다음 장(章)으로 넘어가는 게 순리라고 동서고금 철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루미는 “상실의 슬픔은 용기 있게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거울을 건네준다”고 했고, 러시아 작가 레프 톨스토이(1828~1910)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이(1828~1910)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만이 슬픔을 느낄 수 있고, 치유할 수 있다”는 요지의 말을 남겼다.   지금 한국에서 인기몰이 중인 ‘매운맛’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의 말도 참고할 만하다. “행복은 환상”이라 설파했던 그는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알려면 오래 살아봐야 한다”고 했다. 죽음은 그자체로 애도하면서도, 무의미해 보이는 삶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는 게 우리 시시포스들이 굴려야 하는 돌덩이가 아닐까. 고 이선균 배우의 명복을 빈다. 전수진 / 한국 투데이·피플팀장노트북을 열며 상실 철학자 아르투어 동서고금 철학자들 이선균 배우

2024-01-10

[노트북을 열며] 늙는다는 특권

송편도 먹기 전인데 찬물 끼얹나 싶겠지만, 곧 연말이다. 불평등한 이 세상에서 시간만은 평등하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이 글을 쓰는 기자와 읽는 당신도 곧 한 살 더 먹는다. MZ도 X세대도 늙음에선 벗어날 수 없다. 오늘로 딱 95일 남은 2023년. 추석 연휴를 보내며 잘 늙는다는 의미를 곱씹어 보면 어떠할까. 저출산 고령화라는 거대 쓰나미 속에서 한국의 명절 풍경도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진화 중이다. 나의 늙음을 책임질 이는 나뿐인 사회는, 공과금 명세서처럼 끈질기게 우리를 찾아올 터다.   “잘 늙는다”는 건 자주 “안 늙는다”는 것과 동의어로 취급된다. “아들이 대학생인데, 엄마 아니라 여자친구로 보인대요”라는 식의 팝업 광고처럼. 한국 밖에서도 “60세는 새로운 40세”라는 말이 나온다니, 늙음은 전 지구적 혐오 대상이자 21세기 모두의 투쟁 대상인 걸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늙어감은 특권이었다. 2020년 영국을 울렸던 영국인 엘리엇 대런이 그랬다. 암으로 죽어가던 그는 그해 9월 9일 일간지 가디언 칼럼에서 늙어감을 찬미했다. 늙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당신이 부럽고, 서로와 지구를 위해주며 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칼럼 게재일에 숨을 거뒀다.   대런은 그토록 40대가 되고 싶어했지만 정작 40~50대라는 인생의 중간지점, 중년을 맞는 건 꽤 진지한 각오가 필요하다. 이젠 전설이 된 시리즈 ‘섹스 앤드 더 시티’에 사만다 역으로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마흔이었다는 배우 킴 캐트럴. 올해 66세인 그는 최근 경제전문지 포브스의 한 포럼에 출연해 “마흔이었던 때는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살아보니, 좋아하는 일을 찾고 그 일을 통해 성장하며 나이 먹는 것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잘 늙는다는 것은 자신을 더 잘 알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을 찾아 나가며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의미로 들렸다.   대학생 아들의 여자친구처럼 보이는 외모를 돈으로 가꿨다고 해도, 기품과 체력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랴, 라고 쓰면서도 그 광고를 눌러봤음을 고백한다. 부끄럽다. 늙음과 싸우느라 아등바등할 시간에 중부승모근과 내전근을 단련하고 고관절을 돌보며, 공공장소에서 내 목소리가 너무 크진 않은지, 내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진 않을지를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을 키워야겠다. 나부터 명절을 계기로 가꿔보련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하는 건, 늙어간다는 것도 마찬가지일 테니. 전수진 / 한국 투데이·피플팀장노트북을 열며 특권 대학생 아들 최고경영자도 국무위원장도 칼럼 게재일

2023-09-28

[노트북을 열며] 김정은과 오펜하이머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며 떠오른 사진 한 장. 2016년 3월 9일 북한 노동신문이 공개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지도 사진이다. 자신만만한 표정의 김정은 위원장이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건 동그란 공 모양 물체. 북한의 주장이 맞는다면,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에 탑재해 미국 본토까지 타격 가능한 작고 가벼운 내폭형 핵 기폭장치다. ‘오펜하이머’에서 맨해튼 프로젝트의 물리학자들이 오각형과 육각형의 고폭렌즈를 끼워 구(球) 모양으로 조립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김정은 위원장이 자랑한 내폭장치의 선배 격이다.   ‘오펜하이머’의 과학자들이 고폭렌즈 32개를 조립해 만든 핵폭탄의 이름은 ‘팻맨(fat man)’.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초토화했다. 2016년 북한이 공개한 내폭장치는, 그 주장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약 72개의 고폭렌즈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는 분석이 나왔다. 김정은 위원장은 ‘오펜하이머’를 누구보다도 달뜬 마음으로 보지 않았을까.   ‘오펜하이머’는 적어도 한반도 38선 이남에 태어나 살아가는 우리에겐 단순한 블록버스터 영화일 수 없다. 미국의 핵으로 1945년의 광복은 앞당겨졌지만, 북한의 핵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고 있는 게 2023년 현재 우리의 현실이다. 현실이 무섭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더 무섭다.   2016년 이후, 분명히 늘어난 건 북한의 핵물질과 핵능력밖엔 없지 않을까. 한국은 일관된 대북 정책 없이 정권에 따라 진자 운동과 정쟁만을 되풀이해왔다.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도 심각하지만, 정작 북핵 위협과 북한 인권 문제엔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이들이 상당수다. 그사이 김정은은 열 살로 추정되는 딸 주애의 손을 잡고 미사일 시험발사 현장에 나타나고, 사실상 미사일을 ‘군사정찰 위성’이라며 정상국가 코스프레중이다.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는 원폭 실험에 성공한 뒤,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다음 구절을 되뇌며 자책했다고 한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 21세기의 파괴자를 꿈꾸며 독재 정권의 수명 연장을 꿈꾸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오펜하이머가 했다는 다음 말을 전한다. “(핵폭탄을) 갖게되면 이 나라를 구할 수 있고 평화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635쪽). 북핵 문제는 이미 요단강과 삼도천을 건넌 듯한 절망의 영역으로 치부되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평양의 프로메테우스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의 끈은 놓지 말아야 할 터다. 전수진 / 한국 투데이·피플팀장노트북을 열며 김정은 오펜하이머 북핵 문제 로버트 오펜하이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2023-08-23

[노트북을 열며] 파리 오페라 뒤덮은 샤넬 광고

얼마 전 프랑스 파리에 방문했다가 오페라 가르니에 정면 파사드를 뒤덮은 배우 티모시 샬라메 얼굴에 놀랐다. 그가 모델인 남성 향수 ‘블루 드 샤넬’의 초대형 래핑 광고였다. 오페라 가르니에가 어떤 곳인가. 19세기 나폴레옹 3세 시절 설계돼 샤갈의 천장화를 비롯한 신바로크 양식의 장엄·화려한 내외관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연장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이 같은 문화유산급 건축물 전면을 샤넬 상업광고가 떡하니 메웠다. 측면엔 삼성 갤럭시 광고판도 웅장하게 서 있다.   천박한 상업주의라고 치부하기엔 샤넬과 오페라 가르니에 사이의 인연이 깊다. 샤넬은 이곳에 상주하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POB)의 공식 후원사일 뿐 아니라 메종 설립자인 가브리엘 샤넬(1883~1971) 때부터 발레 의상 제작에 헌신해왔다. 매 시즌 시작을 알리는 POB의 데필레(Defile, 행진) 때 새로 에투알(1급 무용수)이 된 단원은 샤넬이 제작한 의상과 티아라를 착용한다. 얼마 전 POB가 30년 만에 내한해 ‘지젤’을 선보였을 때도 샤넬은 특정 회차 객석을 일괄 구매해 VIP 고객을 들였다. 제품 가격을 수시로 올려 잠재 고객의 원성을 사는 이면에서 이 같은 메세나 활동으로 이미지 상쇄 효과를 누린다.   이득을 보는 건 오페라 가르니에도 마찬가지. 고풍스러운 건물 외관이 현대 명품 이미지에 힘입어 고루함을 벗어던졌다. 무엇보다 거액의 광고비를 받아 질 좋은 공연·전시, 문턱 낮은 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재원으로 활용한다. 또 다른 프랑스 럭셔리 업체 루이뷔통이 지속해서 루브르 박물관과 패션쇼 등 협업을 하고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에 거액을 쾌척하는 것도 이런 ‘윈윈’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도시 전체가 생기를 얻는 것은 덤이다.   아쉽게도 한국의 수도 서울에선 이처럼 대담한 ‘윈윈’을 보기 어렵다.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시행령에 따라 규격과 내용 등이 엄격한 허가 및 신고대상인 데다, 특히 소위 ‘공공장소’라면 시민 정서가 걸림돌이 된다. 광화문 광장에 면한 세종문화회관의 관계자는 “공공건물에 상업광고를 하는 것은 거부감을 살 우려가 있고, 설사 공익광고라 해도 주변과의 조화를 고려해 승인 허가를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안 그래도 경쟁하듯 난립한 대형 간판들이 자아내는 ‘시각 공해’를 고려하면 서울 시내 공연장·미술관 외벽의 브랜드 광고는 시기상조일 것 같긴 하다.   다만 요즘 서울의 공간 이미지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게 ‘정치 현수막’이란 건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난해 12월 여야 합의로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통과하면서 정당 현수막은 수량·규격·장소 제한 없이 보름간 걸 수 있게 됐다. 강혜란 / 한국 문화선임기자노트북을 열며 오페라 파리 샤넬 상업광고 파리 오페라 오페라 가르니에

2023-07-02

[노트북을 열며] 외교의 귀환, 샴페인은 이르다

지난달 18일 프랑스 파리 외교부 청사. 보안검색대를 지나 본 건물로 이어지는 복도엔 우크라이나 전쟁 현장을 담은 액자들이 빼곡했다. 언제 포탄이 떨어질지 모르지만 꿋꿋이 출근하는 여성, 아빠의 손을 꼭 잡은 소녀의 표정은 담담해서 되레 슬펐다. 국민의 삶을 평온히 지키는 것이 외교의 숨은 역할이라는 점을 웅변했다. 직접적 당사자가 아닌 프랑스의 외교부가, 모든 방문객이 지나가는 이 복도에 이들 액자를 걸어둔 의미는 크다. 미·중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외교를 리드하겠다는 포부가 엿보였다. 프랑스 외교부는 이번에 한국뿐 아니라 인도·일본·호주의 주요 매체 기자들을 초청했다. 외교부와 대통령실 엘리제궁의 고위·실무 관료들, 그리고 관련 학자들은 프랑스의 인도·태평양 정책을 유창한 영어로 설명했다. 이들은 궁금해했다. 한국의 인·태 정책 조직은 어떻게 꾸려졌고, 예산은 어떻게 되는지.   윤석열 대통령의 한·미, 한·일 정상회담은 의미가 컸다. 그러나 샴페인은 여기까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 대통령의 ‘아메리칸 파이’를 듣고 박수를 치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횡성 한우 불고기를 두 접시 비웠다고 해서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국제정세 매듭이 풀리진 않는다. 매듭을 풀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에 만족해선 안 될 일이다. 북한을 위한 외교가 아닌 한국 자신의 국익을 위한 외교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국제정세의 체스판은 한국에 절대 유리하지 않다. 어찌 보면 격동의 구한말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외교 난타전이 펼쳐질 것이다. 최근 찾은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일본과 조선의 운명을 가른 씨앗은 이곳에서 움텄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조슈(長州) 출신 5인, 일명 ‘조슈 파이브’가 밀항을 감행하며 서구 문물을 배우고 일본 경제와 산업 발전의 초석을 닦은 곳이다. 한국엔 고(故)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정신적 지주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며, 정한론(征韓論) 등으로 반일감정이 극으로 치닫는 곳이지만,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의 국익을 위해 돌아볼 점은 분명히 있다. 이곳에서 만난 가이드, 와타나베는 “‘조슈 파이브’는 서구 문물을 밤낮으로 흡수하며 새로운 나라 건설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라고 자부했다. 외교의 문을 걸어 잠그고 쇄국의 막다른 길을 택한 조선의 오판이 떠올랐다.   동북아가 들끓고 있다. 윤 정부의 실리 외교 귀환이 반갑다. 하지만 자화자찬은 금물이다. 숨 가쁘게 변하는 세계 외교에 동참하려면 더욱 예민한 촉수를 세워야 한다. 국익과 실리, 잠시라도 방심할 틈이 없다. 최소한 100년 전과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전수진 / 한국 투데이·피플팀장노트북을 열며 샴페인 외교 프랑스 외교부 실리 외교 외교 난타전

2023-05-10

[노트북을 열며] ‘노 재팬’이라는 이름의 유령

지난달 16일 일본 도쿄 다이칸야마(代官山)의 차코트 발레 스튜디오. 수업이 끝난 후, 한 일본 여성이 다가와 “한국에서 오셨다니 반가워요”라며 배우 박서준의 사진을 보여줬다. 발레 선생님도 “요즘 한국 분들이 다시 꽤 오셔서 반갑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도쿄에선 어디를 가도 한국어가 들려왔다. 지난 정권 일었던 ‘노 재팬’ 물결에 용일(用日)을 주장했다가 “친일 토착 왜구의 OO를 찢어버리자”는 악플·악메일 세례를 받았던 게 3년이 채 안 됐는데, 격세지감이다.   숫자도 ‘노 재팬’의 종언을 증거한다. 지난해 출국한 658만145명 중 109만260명이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정부관광국(JNTO) 관계자는 지난해 12월 한 달에만 45만6100명의 한국인이 일본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방일 한국인은 조용하지만 확실히 늘고 있다. 팬데믹 끝에 여행 수요가 폭발했고, 엔저 효과 덕이라고? 하지만 ‘노재팬’ 당시를 생각해보라.     반일감정으로 국민을 조종했던 정치 세력은 휴화산일 뿐이다. 특정 정치세력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그간 이해보다 단죄에 에너지를 쏟았다. 서로의 판단 기준만이 옳다며 두 개나 가진 귀는 틀어막고 하나뿐인 입만 열어왔다. 지금 중요한 건 ‘노 재팬’ 썰물이 남기고 간 잔해를 점검하는 일이다. ‘노 재팬’ 밀물에 휩쓸려간 이들은 얼마나 많은가. 일본 여행 갔다고, 일본 맥주를 마셨다고, 일본 차를 몰았다고 뭇매 맞은 이들 말이다.   정치적으로 선동·악용된 ‘노 재팬’ ‘죽창가’는 영어 표현으로 ‘방 안의 코끼리’다. 불편하지만 모르는 척하는 존재를 뜻한다. 방의 5년짜리 주인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질 뿐. 얼렁뚱땅, 은근슬쩍, 두루뭉수리하게 없었던 일로 지나가서는 코끼리를 방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 오해 마시라. 친일하자는 얘기가 결단코 아니다. 일본에게 따질 것은 냉정한 머리로 끝까지 따져야 한다. 그러나 국가는 이사할 수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국익을 위해 일본은 경계는 하되 때론 손을 맞잡아야 하는 상대다.   차코트에선 “한국에 가서 맛있는 것 먹고 싶다” “BTS는 언제 입대하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인근 에비스의 댄스 스튜디오에선 K팝 클래스가 문전성시다. 정치인들은 소모전을 계속해도 민간교류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 더욱, ‘노 재팬’이라는 이름의 코끼리를 직시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노 재팬 정치’의 진자추는 되돌아올 것이고, 한국은 다시 반일이란 소모적 논란에 굴복하며 뒷걸음질할 것이다. 이렇게까지 성장한 멋진 대한민국에 이웃 국가 일본은 잘 이용해야 할 전략적 파트너다. 전수진 / 한국 투데이·피플 팀장노트북을 열며 재팬 이름 재팬 정치 방일 한국인 가도 한국어

2023-03-01

[노트북을 열며] 분노 포르노

직업 특성상 댓글을 많이 접하다 보니 어느 정도 악플에 무뎌진 편이다. 논리도 없이 욕설을 배설하는 수준의 댓글을 보면 화가 나기보다 측은했다. 댓글을 다는 약간의 노력으로 타인의 분노를 유발함으로써 싸구려 쾌감을 맛보려 하는, 그래놓고 막상 고소를 당하면 선처를 요구하기 급급한 ‘루저’쯤으로 여겼다. 맹목적인 비난의 대상이 기자 본인이든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이든, 내가 휘둘리지만 않으면 괜찮다며 넘겨왔다.   하지만 유독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성폭력 등 각종 사건·사고에서 명백한 피해자를 조롱하거나 가해자로 둔갑시키려 할 때다. 지난달 29일 이태원 참사 발생 직후의 뉴스 댓글창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압사로 추정되는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는 팩트 외에는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는 상황에서도 악플러들은 관련 기사가 쏟아져나올 때마다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사람 많은 곳 놀러 가서 죽은 걸 어쩌라는 거냐”며 피해자들을 탓하고 모욕했다.   여러 번의 압사 위험 신고가 있었고 경찰의 지휘 체계가 부실했다는 점 등 사건의 전모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허위 주장은 힘을 잃어갔다. 하지만 유가족과 생존자들에겐 이미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을 터다. 어쩌면 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헤맬 때 무차별적인 언어폭력까지 당했으니 말이다. 악플러들에게 마치 멍석을 깔아 주는 것 같아 기사를 쓰는 것조차 죄책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는 ‘분노 포르노(outrage porn)’에 무방비로 노출된 삶을 살고 있다. 음란물과 마찬가지로 분노 포르노는 철저히 자기만족을 위한 도구다. 분노 수위를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때로는 무고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악플러들은 불특정 다수에게 음란물을 유포하듯 분노 포르노를 전파하고 중독시키는 유해 물질이나 다름없다.   가장 우려되는 건 본의 아니게 분노 포르노에 반복적으로 노출돼 진짜 분노해야 할 문제마저 외면하게 되는 일이다. 시 티 응우옌(C. Thi Nguyen) 미 유타밸리대 철학과 교수는 2019년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진정한 분노는 우리가 행동하고 불의에 맞서 싸우도록 동기를 부여한다”며 “분노 포르노는 이런 분노의 순기능을 약화한다는 점에서 매우 골칫거리”라고 분석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누군가는 비속어와 차별적 언어를 총동원해 분노 포르노를 양산해내고 있다. 그 피해자는 악플의 당사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다. 뾰족한 해법이 없다는 이유로 악플에 둔감해지기엔 사회적 폐해가 너무 크다. 김경희 / 한국 EYE팀 기자노트북을 열며 포르노 분노 분노 포르노 분노 수위 뉴스 댓글창

2022-11-25

[노트북을 열며] 프로크루스테스 대한민국

인터뷰 기사를 써서 밥을 먹고 살지만, 인터뷰만큼 두려운 게 없다. 한 사람의 인생을 기사라는 영생의 형태로 새긴다는 무게 때문이다. 시행착오 끝 얻은 답은 겸손함. 내가 아는 틀에 남을 끼워 넣지 않고, 남의 삶으로 나의 틀을 키우려고 노력이라도 해보려 한다. 그리스 신화 중 방문객이 자기 침대보다 작으면 늘려서, 크면 잘라서 살해하는 프로크루스테스처럼은 되지 말자는 각오. “너는 네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알 뿐”이라는 말에서 자유로운 이는,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도, 김어준 진행자도,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포함해, 아무도 없다.   김건희 여사가 누군가의 팔짱을 꼈다는 이유로 “그런 걸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라거나 “불편하다”고 단죄하듯 말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김정숙 전 퍼스트레이디가 프랑스 대통령의 팔짱을 꼈다는 것을 홍보했던 이전 청와대 글은 온라인에 박제까지 돼 있다. 다른 편이라고 떳떳한가.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에 출석해 “웃기고 있네”라는 쪽지를 보내는 건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지탄받을 일이다. 기회의 평등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는 점은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데, 특정 언론사의 취재 기회를 제한하는 행태는 또 어떤가. 결국 대한민국 정치는 프로크루스테스 난장 파티다. 보수와 진보라는 타이틀도 아깝다. 그 가치의 간판이 가져올 표심만을 위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진자운동을 되풀이하며 국가의 성장이나 국민의 고복격양엔 관심 따위 없는 게 2022년 11월 한국 아닌가.   이태원 참사로 150명이 넘는 생명이 사라졌는데,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얄팍한 수와 손가락질, 윽박만 넘쳐날 뿐이다. 제2의 이태원 참사를 막기 위한 대대적 점검 계획 등은 안 보인다. 팬데믹 마지막 출퇴근길 대중교통은 악다구니 콩나물시루. 대한민국에 사는 이들은 몸과 맘이 모두 고생이다.   그럼에도 비관주의 일변도일 수는 없다. 소설가 김연수는 신간 .이토록 평범한 미래.(문학동네)에 썼다.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 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아무리 세찬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중략) 사람들처럼.”   최근 인터뷰한 김덕신 여사는 마비를 딛고 화가로 데뷔한 소감을 이렇게 피력했다. “아프지 않았다면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요. 세상의 모든 아픔엔 감사해야 해요.” 아픔에서도 배우는 겸손한 자세가 빛났다. 대한민국 정치가 얄팍한 진자운동을 멈추고 아픔을 성찰하며 성장할 수 있기를. 이태원 참사 피해자들의 명복을 빈다. 전수진 / 한국 투데이·피플 팀장노트북을 열며 프로크루스테스 대한민국 프로크루스테스 대한민국 프로크루스테스 난장 대한민국 정치

2022-11-16

[노트북을 열며] 미국 덮친 ‘절망사’, 한국도 위험수위

자살과 약물·알코올 중독에 따른 사망을 뜻하는 ‘절망사’(絶望死·Deaths of Despair)는 2015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앵거스 디턴이 제기한 사회문제다. 그는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미국 저소득·저학력 백인 노동자 계층이 국가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절망사의 절벽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19일 방송통신대 강상준 교수 등이 수행한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연구용역 보고서 ‘한국의 절망사 연구:원인 분석과 대안 제시’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장기간 유지하고 있다. 자살은 10대·20대·30대의 사망 원인 1위, 40·50대에서는 2위다. 주로 관계의 어려움과 경제적 문제에 따라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알코올성 간질환, 알코올성 심장근육벽증 같은 알코올 관련 사망도 심각해지고 있다. 2020년 알코올 관련 사망자는 5155명으로 2000년(2698명)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다. 2020년 기준 알코올 중독 추정 환자 수는 약 152만 명에 이르며, 특히 여성과 20~30대 젊은 계층에서 관련 진료가 증가하고 있다.   마약·약물 중독과 관련해서도 한국은 더는 ‘안전지대’가 아니다. 인구 10만 명당 마약사범의 적발 수를 일컫는 ‘마약범죄계수’가 20을 넘으면 ‘마약 확산’ 위험이 크다고 보는데, 지난해에는 이 수치가 31.2에 달했다. 연구진은 “사회계층 이동에 대한 기대치가 낮고, 사회적 고립감이 높아지는 추세”라며 “한국 사회가 절망사의 위험에서 이미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한다”고 했다.   실제 ‘본인의 계층 이동 가능성’에 대해 2011년에는 응답자의 32.8%가 긍정적으로 봤지만 2021년에는 26.7%로 줄었다. 부정적으로 본다는 응답은 같은 기간 54.0%에서 58.0%로 늘었다. ‘사회적 고립을 느낀다’고 응답한 비율은 2017년 53.4%에서 계속 올라 2021년 56.6%를 기록했다.   특히 10대~30대 자살자와 알코올 중독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고, 온라인 마약 유통이 활성화되면서 젊은 층이 마약·약물에 노출되는 사례가 늘고 있는 점이 걱정스럽다. 취업, 내집 마련 등에서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는 점이 미국 백인 노동자의 절망사와 맞닿아 있어서다. 차승은 수원대 아동가족복지학과 교수의 진단이 새겨들을 만하다.   “가장 왕성한 꿈을 갖고 생산해야 할 때 절망사한다는 것은 청년층의 사회 여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미래를 이끌어 갈 청년층의 경제적·사회적 안전망 확보를 중심으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손해용 / 경제정책팀장노트북을 열며 미국 위험수위 알코올 중독자 절망사 연구 한국 사회

2022-07-20

[노트북을 열며] 검찰총장의 자격

소년 시절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 빠진 적이 있었다. 달타냥과 다른 세 명의 검사(劍士)들이 루이 13세와 주로 도트리슈 왕비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펼치는 무용담이 정의로워 보였다. 당시 프랑스 왕실 근위대에 신설된 머스킷총 부대, 즉 총사대(Mousquetaires de la garde)가 모델이다. 여전히 총사들이 주로 칼을 썼기에 원작 소설이나 동명의 영화엔 검투극만 많이 나온다.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tous pour un, un pour tous)’라는 총사대 구호도 유명하다.   총사대는 따지자면 현재 대통령 경호실의 기원쯤 되지, 검사(檢事) 제도의 연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대신 당시 프랑스 왕의 개인 소송대리인 ‘왕의 대관’(procureur du Roi)이 검사의 기원이다. 혁명 이후 민주공화국이 수립된 뒤에야 검사는 비로소 국가의 법 집행, 특히 형벌권 집행을 책임진 공화국의 대관이 됐다. 미국이 검사를 국가의 대리인(변호인·US Attorney), 검찰총장(법무부 장관)을 그 대리인들의 장(US attorney general)으로 부르는 것도 같은 어원이다. 한마디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법 집행을 책임진 만큼 누구보다 중립적이고 공정하란 뜻이겠다.     검찰 원로·전직 검찰총장 여러 명에게 12일 국민 천거 절차와 함께 시작된 윤석열 정부의 초대 검찰총장의 가장 중요한 자격이 뭐냐고 물었다. 모두가 ‘검찰을 중립적으로 이끌어 갈 능력’을 1번으로 꼽았다. 2300명 검사를 좌고우면하지 않고 중립적으로 이끌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소신과 능력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다.     총장을 지낸 원로 한 명은 “검찰 출신 대통령과 그 최측근이자 차기 대선 후보로도 거명되는 법무부 장관의 ‘그립’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총장 자신이 조직 안팎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어야 한다”고도 했다. 또 다른 원로는 “누가 되더라도 무능한 총장은 될지 몰라도 식물총장은 안 될 것”이라며 “군령권 없는 각 군 참모총장들과 달리 검찰총장은 군정권과 군령권(수사지휘권)을 24시간 행사한다”라고도 했다.   차기 총장은 문재인 정부 청와대와 직결된 ‘서해 공무원 피살’ ‘탈북 선원 강제 북송’ 및 대선 후보였던 이재명 민주당 고문 관련 사건 등 이른바 전 정부 수사를 지휘하기에 그만큼 중요한 인선이라는 뜻에서 한 말이다. 새 정부 출범 63일 만에 역대 최장 지각 인선을 책임진 총장후보추천위원장을 김진태 전 총장이 맡았다. 그의 어깨가 너무나 무겁다. 정효식 / 사회1팀장노트북을 열며 검찰총장 자격 초대 검찰총장 전직 검찰총장 개인 소송대리인

2022-07-13

[노트북을 열며] ‘도어스티밍’을 기다린 건 아닌데

그건 기다리던 일이 아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5일 출근길 기자 문답, 이른바 ‘도어스테핑(door stepping)’에서 화를 냈다는 소식 말이다. 생소한 표현의 일일 행사에 국가적 관심이 쏠려 뭔가 못마땅한 느낌이 있었는데, 그 촌각을 못 참고 대통령의 속내를 드러냈다니 안타까움이 더했다.   도어스테핑은 한국에서의 용례와 달리, 영국 등에선 민감한 이슈에 연루된 취재원 집 앞에 기자가 찾아가 반기지 않는 취재를 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공익 보도와 특종 욕심 사이를 오가는 기자의 행태가, 한국에서는 국정 현안에 대한 최고 권위의 논평 자리가 됐다. 그렇게 정체가 불분명한 시공간에서 도어 ‘스티밍(steaming·몹시 화가 난)’까지 벌어졌다는 소식에 난감함을 느낀다.   윤 대통령이 받은 질문이 열 받을 만한 것이었는지도 의문이다. 최근 장관급 인사와 관련해 “인사 실패라는 지적이 있다”는 상투적인 것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제스처까지 취하며 “다른 정권 때하고 한 번 비교를 해보라”면서 공직 후보자들을 감쌌다.   그 포인트가 바로 국민이 기다리던 것임을 모르는 것인가. 대통령이 자부하는 후보자의 훌륭함을 국민에게 알리고, 새로운 공복을 신뢰하게 하고, 새 정부가 추진하려는 개혁의 적임자임을 공감하게 하는 일 말이다.   박순애 교육 부총리는 인사청문회 없이 임명됐다. 국회 원 구성 차질 때문이라지만, 법으로 보장된 관찰 기회마저 놓친 국민은 허탈감을 넘어 괘씸함을 느낀다. 동네 마트에서 수박을 살 때도 꼭지가 말라 비틀어지진 않았는지 주인장의 확인을 받지 않던가. 게다가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인 실정의 하나였던 ‘청문회 패싱’ 아닌가.   박 부총리의 가장 큰 결격 의혹으로 거론되는 만취 음주운전 전력(2001년 12월)에 대한 공적인 평가 기회는 사라졌다. 여야의 관점이 확연히 갈렸던 쟁점이었다. “잘못됐지만, 20년 전의 일일 뿐”(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이라는 용서, “더 오래된 음주운전 전력 때문에 교원 포상을 못 받은 교장이 많다”(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는 비판 사이에서 국민은 고민하고 선택할 시간이 필요했다. 박 부총리 입장에서도 잘못된 첫인상을 바로잡을 기회를 날린 셈이다.   진정한 소통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 국민의 처지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는 부조리극 속 주인공을 닮았다. 고도가 누구인지, 오는지 안 오는지도 모른 채 기다리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실존이다. 기다림을 숙명으로 알고 지쳐도 멈추지 않는 그들이 있다는 걸 윤 대통령이 한시도 잊지 않기를 바란다. 김승현 / 정책에디터노트북을 열며 도어스티밍 윤석열 대통령 음주운전 전력 참고 대통령

2022-07-06

[노트북을 열며] ‘한국형 FBI’가 낳은 ‘한국형 후버’

미국에는 한국의 13만 국가경찰과 같은 연방 경찰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미국 독립 직후인 1789년 의회가 법원조직법을 제정하며 연방 검사와 함께 창설한 연방보안관(US Marshal)이 최초의 연방 법집행기관이다. 연방 법무부 장관(검찰총장) 소속이다. 주 임무도 연방 죄수를 호송하고 수배자를 체포하고 연방 증인을 보호하고 압류 자산을 관리하는 등 우리 검찰에 가깝다. 각 주가 모여 합중국을 구성한 미국엔 주와 시·카운티·타운마다 자치경찰(또는 보안관)이 있기 때문이다.   1908년 창설된 법무부 수사국이 모태인 연방수사국(FBI) 역시 경찰이 아니다. FBI 구성원은 특별 수사관이고, 별칭이 ‘지맨(Government man)’이다. 연방정부 요원이란 뜻이다. 반독점법 위반, 금융·토지사기, 특허범죄 등 신종 연방 범죄와 무정부주의와 같은 국가안보 위협에 대응하는 연방 기구의 필요성에 탄생한게 FBI였다. 그전까지 법무부는 자체수사 인력 없이 매번 재무부 산하 위폐 단속 조직인 비밀조사국(Secret Service·1865) 요원을 빌려 쓰다가 당시 의회가 제동을 걸자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법무장관이 직접 요원을 채용해 상설 조직을 만들도록 했다. 이후 국세청(IRS)에서 금주법을 집행하는 밀주단속국을 법무부로 이관받아 흡수하면서 FBI는 점점 커졌다. 마피아의 대명사인 알 카포네와 전쟁을 벌인 그 조직이다.   하지만 FBI는 1924~1972년 무려 48년간 종신 수장을 지낸 에드거 후버 국장을 빼고 얘기할 수 없다. 그는 FBI를 세계 최고 수사기관이자 국내 정보 기구로 키웠지만 동시에 할리우드 배우부터 대통령까지 사찰한 권력남용의 대명사였다. 국가안보를 이유로 1930년대부터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보수집 허가를 받아 극우 및 공산주의자란 혐의를 두고 민간인에 대한 광범위한 도청과 사찰을 벌였다. 심지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노어 여사를 시작으로 트루먼·아이젠하워·케네디·존슨·닉슨 등 후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의 사생활과 국정 전반을 도청하기도 했다. 트루먼과 케네디 등이 후버를 여러 번 해임하고 싶어했지만 그때마다 ‘후버 파일’의 위협에 뜻을 접어야 했다.   문재인 정부는 검찰권 비대화 때문에 70년 검찰 수사권을 완전히 폐지하는 대신 ‘한국형 FBI’를 만들겠다고 한다. 한국형 FBI 구상대로 제도를 수입하면 ‘후버’란 괴물도 따라올 경우 견제 장치는 어떻게 할 건가. 그보다 당장 2024년 국정원 안보수사권을 이관받는 FBI 몇 배 규모의 치안·수사·정보기관이 탄생하는데 아무 대책이 없다. 정효식 / 한국 사회1팀 팀장노트북을 열며 한국형 후버 루스벨트 대통령 에드거 후버 후임 대통령

2022-04-27

[노트북을 열며] 이상한 ‘민국’의 왕위 찬탈 게임

 우리 ‘민국’에는 비밀이 있다. 민국의 헌법을 국보로 보존할 심산인지 구중궁궐 푸른 기와집 비밀 금고에 꼭꼭 숨겨둔다는 거다. 헌법은 5년마다 치르는 민국 주민의 공무를 대행하는 대표 공무원 선거 때 반짝 빛을 보지만 투표용지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금고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주민들은 이상한 마법에 걸려 헌법에 대한 기억도 잃는다. 대표 공무원은 뽑히자마자 자신을 성군·개혁군주·철인왕 등 온갖 미사여구로 ‘왕(王)’을 참칭하지만,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헌법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는 소문이 돌 뿐 의미를 이해하는 주민은 없다고 한다.   ‘민국은 주권=통치권력이 국민에 영속해서 있고, 국민이 통치하는 국민의 나라다. 국민주권은 나눌 수도 없고 양도·위탁·매도가 불가하다’는 해설 역시 풍문으로 돌았다. 민국 역사서에 따르면 이 헌법 1조 조문은 1948년 민국을 건국할 때 만들어졌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반역자들이 있었던 아픈 민국의 전사(前史) 때문에 1조를 썼다. 이씨 왕조와 양반 귀족,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와 단절하고 구왕조와 식민지 시절의 모든 특권을 일소하는 결단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뽑힌 왕’에 기생한 측근의 부정선거와 두 번의 군사반란으로 민국 주민은 27년간 통치권력을 찬탈당하고 매일 군사독재자 사진 앞에서 충성을 맹세하는 굴욕을 겪었다.   이제 민국 주민은 민주화 혁명을 통해 스스로 권력을 되찾은 뒤 35년동안 7번째 대표 공무원을 뽑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도 수상한 마법을 풀고 헌법에 대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지 아무도 모른다.   민국엔 이런 헌법 해석에 반대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이니 선출된 권력(왕)이 아니냐’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우리 헌법은 주권자 국민 위에 그 무엇도 두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통치권자 국민이 5년 계약직 대표 공무원을 뽑는 대선의 기준을 바꾸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대표 공무원부터 국민 기본권 신장에 복무하는 진짜 봉사자로 바꿀 수 있다. 민국은 국민권력을 사유화하고 약탈하는 ‘왕위 찬탈 게임’을 종식하고 그 너머로 나갈 수 있다. 대장동 비리 주범 김만배의 “형이 말이야”로 시작하는 녹취록에 좌우되는 코미디 대선도 끝내야 하지 않을까. 정효식 / 한국 사회1팀장노트북을 열며 왕위 찬탈 왕위 찬탈 대표 공무원 주권자 국민

2022-02-23

[노트북을 열며] 평창 여름올림픽을 상상한다

‘폭설은 올림픽 개최지 베이징에 반가운 문젯거리(Welcome Problem).’   지난 12일 로이터 환경 기사 목록의 톱뉴스로 걸린 기사다. 자원봉사자들이 싸리빗자루를 들고나와 눈 쌓인 바닥을 바쁘게 쓰는 사진과 함께다. 스키 경기 등이 열리는 중국 허베이성 장자커우는 이날 새하얀 색으로 뒤덮였다. 갈색의 황량한 모습에서 완벽한 환골탈태. 눈도 안 오고 올림픽 느낌도 나지 않던 베이징을 위한 하늘의 선물이었던 걸까. 겨울올림픽 도중 눈이 내리는 게 외신의 빅뉴스가 된 웃픈 현실이다.   편파판정 논란으로 말 많고 탈 많은 올림픽이지만, 최고의 뉴스메이커 중 하나는 눈(雪)이다. 설상(雪上) 종목이 열리는 베이징 인근 지역은 기계의 힘을 빌린 인공눈 사용률이 100%에 달한다. 자연설 구경이 어려워서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지구 밖 인공위성으로 경쟁국 경기장을 엿봤다. 지난달 말 NASA 사진에선 하얀 스키 슬로프와 바짝 마른 주변 산지가 뚜렷한 대비를 이뤘다.   그렇다 보니 가뭄을 겪는 주민들 먹을 물로 경기장을 채운다. 이번 올림픽용 인공눈을 만드는 데 물 1억8500만L가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1억 명이 하루 동안 마실 양을 제설기로 쏟아내는 셈이다.   “베이징은 개최 자격이 없다”고 비웃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4년 뒤 올림픽이 열릴 이탈리아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중국과 이웃한 한국은 더 불안하다. 기후변화가 빠르게 덮치고 있어서다.   4년 전 기억이 생생한 강원 평창은 이대로라면 겨울올림픽을 다시 꿈꿀 수 없을지 모른다. 지난달 캐나다 워털루대 연구팀은 지구 온난화가 현 수준으로 이어질 경우 역대 겨울올림픽 개최지 21곳 중 일본 삿포로만 2080년에도 다시 치를 수 있을 거라고 분석했다. 평창은 아예 2050년부터 개최가 불가능하다는 ‘빨간불’이 들어왔다. 베이징은 개최 불확실을 뜻하는 ‘노란불’이 떴다. 평창이 기후위기 직격탄을 더 맞는 셈이다.   겨울 기온이 높아지고 눈도 오지 않는다? 아예 이참에 평창 여름올림픽을 유치하는 상상을 해본다. 시원한 환경에서 선수들 경기력을 끌어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기상청은 지난해 말 평창이 참고할 만한 국내 기후 전망 자료를 내놨다. 지금처럼 탄소를 계속 배출하면 2081~2100년 강원도의 연중 폭염일수는 두 달(60.7일)까지 치솟는다. 반면에 같은 시기 국내 전역의 겨울 지속 기간은 평균 39일에 그친다. 여름이냐, 겨울이냐. 30년 뒤 평창올림픽이 언제 열릴 수 있을지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아니라 우리에게 달렸다. 정종훈 / 한국 사회정책팀 기자노트북을 열며 여름올림픽 평창 평창 여름올림픽 역대 겨울올림픽 겨울올림픽 도중

2022-02-20

[노트북을 열며] 중국은 중국을 잃어야 한다

 중국이 진정한 대국(大國)이 되려면 멀고 멀었다. 지난 6일 개막한 베이징 겨울올림픽이 명약관화한 증거다. 편파 판정이나 개막식 한복 논란 같은 몇몇 팩트 때문만이 아니다. 중국이 한국을 바라보는 본심은 기실, 새로운 게 아니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윤동주 시인 생가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이라는 표지석이 10년째 버티고 있으며, 2016년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체계 논란 당시엔 한국 기업이 현지 정부기관은 물론 주민들에게 테러를 당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방중을 취재하던 한국인 사진기자 1명을 중국 정부 경호원 15명이 폭행해 안구출혈 중상까지 일어난 일도 있다.   쐐기를 박았던 건 2017년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발언이다.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다른 곳도 아닌 미·중 정상회담에서 말했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방중 당시 베이징대 연설에서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 “대국”, 한국은 “작은 나라”라 칭했다. 나라 대 나라에서 보면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이번에 중국에 항의를 제대로 못 한 건 놀랍지 않다. 다음달 새로 출범할 정부는 한·중 관계를 초석부터 다시 쌓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건 몇 사건에 발끈하는 일이 아니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중국은 비단 한·중 관계를 떠나 국제사회 전체에 ‘국격’의 가치를 되레 일깨웠다. 시 주석은 2012년, 중국이 세계의 중심 역할을 했던 과거의 영광을 21세기에 살리겠다며 중국몽(中國夢)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러나 전 세계의 축제인 올림픽을 중국 체전으로 스스로 격하시킨 중국 정부다. 소위 중국몽은 아직 미몽임을 웅변하는 증거일 뿐이다.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사람에겐 모두가 기꺼이 복종한다.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으로가 아니라, 힘이 모자라기에 복종을 하는 척할 뿐이다.” 중국의 성현, 맹자가 한 말이다. 2022년 중국엔 경제력과 인구 등 국력, 즉 힘은 있지만 덕이 없다. 자국팀으로 출전한 피겨스케이팅 선수에게 넘어졌다는 이유로 야유를 보내는 게 가히 덕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중국의 또 다른 성현, 장자는 ‘오상아(吾喪我)’, 즉 “나를 잃고 나서 나를 찾았다”고 했다. 힘만을 앞세운 중국을 잊고 덕을 펼치는 중국으로 거듭나지 않는 이상 중국을 진정으로 대국으로 대접할 일은 없다. 물론 중국이 태도를 갑자기 바꾸고 진정한 대국으로 오상아 할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 딱하다. 중국도, 한국도. 전수진 / 한국 투데이·뉴스 팀장노트북을 열며 중국 베이징 겨울올림픽 한국인 사진기자 조선족 애국시인

2022-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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